EDWARD HOWARD : PILLAR OF AMERICAN HOROLOGY

미국의 시계 매뉴팩처는 19세기 중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가장 융성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회중시계에만 지나치게 집중했던 미국의 시계 산업은 1929년 경제공황과 손목시계의 일반화로 쇠퇴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E. 하워드 & Co.'라는 문구를 새겨놓은 칼리버.

미국의 모든 사회 계층이 자신만의 시계를 보유하는 일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부터 미국의 시계 회사들도 급속도로 성장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의 호시절은 1930년대에 멈췄다. 1929년에 경제공황이 불어닥친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손목시계가 회중시계를 대체하기 시작했고, 시계 제조 기술도 스위스 사업가들에게 뒤처졌다.

낡은 건물과 기계, 카탈로그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미국 시계 제조업체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반면 세월이 흘러도 당시에 만들어진 시계들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기억에서 거의 지워진 미국 시계 브랜드 중에는 뛰어난 전문 기술을 보유하고 훌륭한 엔지니어들을 많이 양성했던 브랜드가 하나 있었다. 이 브랜드의 워치메이커들은 훗날 스위스의 시계 브랜드에서 스카우트했을 정도로 기술이 뛰어났다. 미국에서 스위스로 공장을 이전한 브랜드도 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시계 브랜드 IWC가 대표적이다. IWC를 창립한 플로렌틴 애리오스토 존스(Florentine Ariosto Jones)는 미국의 보스턴에서 스위스의 샤프하우젠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스위스로 떠나기 전까지 애리오스토 존스는 미국의 에드워드 하워드(Edward Howard) 매뉴팩처에서 무브먼트를 개발했다. 에드워드 하워드는 미국 시계 산업의 역사상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흥미로운 무브먼트를 개발하던 회사이자 당시 스위스를 능가하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확성을 향한 열정

↑하워드 시계의 지면 광고(1909).

워치메이커 에드워드 하워드는 1813년에 태어났다. 그는 윌러드(Willard) 가문에서 워치메이커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840년에 기계 기술 학위를 땄고, 이후 D. P. 데이비스(David Porter Davis)와 함께 시계를 포함한 각종 기계들을 제조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시계 제작에 관한 기준이나 규격이라는 것조차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품질 기준도 직접 개발해야 했다. 많은 회사가 그랬듯이 에드워드 하워드도 시계 이외의 제품을 생산하며 다양화를 시도했다. 비록 소형 기계장치라는 공통 분모는 있었지만, 제품의 범위는 벽시계부터 재봉틀, 정밀 저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러던 중 에드워드 하워드는 시계 제작 기술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각종 기념 시계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매장이나 은행, 호텔, 의원 사무실 등에 하워드 시계가 걸리기 시작했고, 시계에 브랜드 이름이자 워치메이커의 이름을 상장하는 로고를 잘 보이게 새겨놓은 덕분에 눈에 띄는 광고 효과를 낼 수 있었다.

↑하워드 시계의 지면 광고(1913).

에드워드 하워드는 매우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정확한 시계를 만들기 위한 열정 또한 대단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위대한 시계 회사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품어왔다. 시계 시장의 잠재력이 매우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시계 산업의 일인자가 되고자 했던 그는 시계 제작 분야에 큰 관심을 갖고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1850년 하워드는 매사추세츠 주의 록스버리(Roxbury)에서 데이비드 데이비스(David Davis), 에런 러프킨 데니슨(Aaron Lufkin Dennison)과 함께 시계 회사를 열었다. 그의 동업자들은 이미 각자의 시계 매뉴팩처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찍이 하워드는 규격화해서 교환할 수 있는 부품을 생산하면 시계 생산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브먼트의 신뢰성도 크게 높일 수 있으리라고 예견했다. 이렇게 해서 ‘아메리칸 시스템 오브 워치 매뉴팩처링(American System of Watch M anufacturing)’이 탄생하게 되었다. 시계 제작에서 이는 매우 혁신적인 접근법이었고, 이 방식이 나중에 시계의 공장형 생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데니슨은 이때부터 이미 완전히 교체할 수 있으면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정확성을 자랑하는 무브먼트 부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같은 작업 방식은 그 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플레이트에 브리지를 고정하기 위해 구멍을 뚫는 작업을 가장 잘하는 직공들이 집에서 각자 부품을 조립하는 방식이었다. 하워드는 시계 부품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산업적 구조를 세우겠다는 발상을 실현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다. 1851년, 이번에도 록스버리에서 그는 아메리칸 오롤로그 컴퍼니(American Horologue Company)라는 새로운 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같은 해에 같은 장소에서 워런 매뉴팩처링(Warren Manufactoring)을 출범했다. 그러나 하워드의 초기 브랜드들은 조직력이 부족했고, 완전히 전문화된 회사를 세우는 데 필요한 자본도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하워드가 선구자라 하더라도 시계에 대한 관심 자체가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그렇게 높지 못했고, 사업에 투자할 재력가들 역시 시계 시장이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 최초의 시계 매뉴팩처의 탄생

↑21개 주얼을 사용한 칼리버.

1853년 에드워드 하워드는 보스턴에 시계 매뉴팩처인 보스턴 워치 컴퍼니(Boston Watch Company)를 세웠다. 이번 회사도 오래 가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당시 기준을 만족시키는 품질의 시계를 대규모로 생산할 수 있었다. 회사는 1857년에 매각되어 매사추세츠의 ‘월섬 아메리칸 워치’와 록스버리의 ‘에드워드 하워드 & 컴퍼니’가 탄생했다. 에드워드 하워드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하리라 확신하고 제조 설비의 일부를 직접 구매함으로써 기계와 장비, 조립하지 않은 부품 등을 회수할 수 있었다. 그는 구매에 투자할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재력가인 찰스 라이스(Charles Rice)와 협력해 1857년 말에 새로운 시계 회사인 록스버리 팩토리를 열었다. 하워드와 그의 동업자는 시계 제작에 필요한 모든 작업을 해낼 수 있는 회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록스버리 팩토리는 미국의 시계 역사에 최초로 기록될 진정한 시계 매뉴팩처라 할 수 있다.

하워드는 특히 무브먼트를 고안해내는 데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예전부터 상상해오던 칼리버를 설계해냈다. 다이얼에는 ‘에드워드 하워드 & 컴퍼니’라고 새겨넣었지만, 일부 무브먼트에는 ‘하워드 & 라이스’라고 새겼다. 당시에는 시계 자체에 대한 이미지가 시계의 인기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라이스라는 권위 있는 이름을 함께 썼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시계의 우월성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었다.

↑21개 주얼의 칼리버를 탑재한 회중시계.

1858년부터 하워드는 전적으로 자신이 개발한 최초의 시계 모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는 좀 더 고품질의 시계를 제작하길 원했고, 시계의 정확성과 무브먼트의 완성도를 우선순위로 삼았다. 그 결과 하워드의 매뉴팩처는 고품질의 무브먼트를 전문적으로 제작할 수 있었고, 이러한 선택으로 다른 시계 회사들과의 차별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는 기어 트레인을 정교화했고, 브리지를 4개의 나사가 아닌 6개의 나사로 고정한 칼리버를 개발했다. 나아가 금 소재로 시계의 밸런스와 충격 흡수 나사를 제작했는데, 황동으로 만들었을 때보다 금속의 밀도가 더 높아져서 성능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모든 면에 두루 호기심이 많았던 하워드는 스위스에서 진행된 정확성에 관한 연구의 진행 상황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스위스 사람들이 발명가의 이름을 따서 일명 ‘기욤(Guillaume)’이라 일컫는 이중 금속 소재의 밸런스에 관심을 쏟고 있을 때였으므로 하워드로서도 자신의 시계에 새로운 무언가를 불어넣어야 했다. 스위스와 미국의 워치메이커들이 시계의 정확성에 대해 벌이는 치열한 경쟁은 기술 발전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 하워드는 가능한 모든 경로를 탐색했다. 그는 배럴의 구조를 전적으로 다시 설계해 제작 기술을 한 단계 진화시켰고, 칼리버의 사이즈를 키워서 데니슨사에서 만든 케이스에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또한 20리뉴가 넘는 큰 무브먼트도 만들었다. 1868년에는 하워드 시계가 3만 개 가까이 판매되기도 했다.

화려한 회중시계 시대의 종언

↑루비 23개 버전의 하워드 회중시계. 하워드의 시계는 대부분 금이나 은으로 제작되었다.

같은 해 일본 천황이 삿포로 시와 이시카리 시에 지방 정부를 새롭게 세우기 위해 미국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하워드는 이를 기회로 삼아 특별한 시계를 제작하고자 했다. 그는 윌리엄 휠러(William Wheeler)의 계획에 따라서 1878년에 삿포로 대학교의 탑 꼭대기를 장식할 시계를 제작했다. 언제나 새로운 혁신을 추구하는 하워드는 1868년에 열쇠로 시계의 태엽을 감는 시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계추를 이용해 시계태엽을 감는 방식을 도입했다. 열쇠로 태엽을 감는 방식은 실제로 10년 후에 완전히 사라졌다.

에드워드 하워드는 1882년에 완전히 사업에서 손을 떼고 ‘에드워드 하워드 & 컴퍼니’의 지분을 팔았지만, 에드워드 하워드가 설계한 시계는 1903년까지 여전히 매뉴팩처에서 생산되었다. 당시의 시계는 대부분 금이나 은으로 제작되었다. 강철에 금을 입힌 케이스는 나중에 시계 케이스 제작 회사인 키스톤(Keystone)이 등장하면서부터 볼 수 있었다.

에드워드 하워드는 산업적 시계 제작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하워드의 매뉴팩처는 20세기 초부터 이미 6곳의 각기 다른 방향에서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무브먼트를 생산해냈다. 이 시기에 생산된 시계의 다이얼에는 ‘에드워드 하워드 워치 & 컴퍼니-보스턴’이라는 문구 대신 ‘에드워드 하워드’만 새겨넣었고, 나중에는 ‘하워드’만 새겼다. 비록 그 무브먼트 자체가 ‘에드워드 하워드 워치 & 컴퍼니 - 보스턴 USA’에서 제작한 것이었어도 말이다.

1930년경 키스톤이 하워드 브랜드의 시계 조립을 그만두면서부터 하워드 브랜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하지만 매뉴팩처가 문을 닫기 직전까지 하워드의 무브먼트들은 뛰어난 품질을 자랑했다. 특히 루비 21개와 23개를 쓴 크로노미터의 경우에는 로듐 처리한 부품 마감 기술이 최고의 매뉴팩처에 걸맞은 수준이었다. 하워드 브랜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에드워드 하워드의 가장 큰 열정이었던 정확한 시계 제작을 위해 여전히 힘쓰고 있다. 시계 산업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큰 발자취를 남긴 브랜드로서 스스로의 기원을 되찾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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