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스 나르당: 1874, THE YEAR OF AN EXCEPTIONAL CHRONO CREATED BY ULYSSE NARDIN

스위스 시계 산업의 개척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무브먼트를 제작할 수 있는 상당한 전문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율리스 나르당도 그 선구자 중 하나였다. 그는 당시 시계의 정확성을 신의 경지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율리스 나르당이 섬겨왔던 단 하나의 본질적인 신념, 바로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워치메이커 율리스 나르당

시계 제작자 율리스 나르당은 크로노미터 시계 제작자였던 아버지에게서 시계를 만드는 교육을 받고, 1846년 그의 나이 23세에 스위스 르로쿨에 매뉴팩처를 세웠다. 젊고 열정적인 워치메이커였던 율리스 나르당은 경쟁자들 사이에서 돋보이기 위해 시계의 정확성에 특히 집착했다. 한편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율리스 나르당의 브랜드 명성에 크게 기여했던 ‘마린 크로노미터’를 개발한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아들 폴 다비드 나르당(Paul-David Nardin)이었다. 폴 다비드는 1876년에 아버지 율리스 나르당이 작고하고 난 뒤 가업을 물려받았다. 시계와 크로노미터 제작에 관한 교육을 받은 폴 다비드는 두각을 나타내며 국제 크로노미터 대회에 출품할 시계들을 직접 준비했다. 그리고 1876년 제네바의 ‘소시에테 데 자르(Société des arts)’ 1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국제 시계 정확성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며 크로노미터 제작에 관한 뛰어난 재능을 입증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 크로노미터의 번호는 4982였다.

율리스 나르당을 부흥시킨 폴 다비드 나르당
명민한 시계 장인 폴 다비드는 계속해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가 제작한 크로노미터는 스위스의 뇌 샤텔 천문대, 영국의 큐테딩턴 천문대, 미국의 워싱턴 천문대는 물론 세계 각지의 관측소에서 주관하는 크로노미터 대회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게다가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탁월해서 매뉴팩처를 효율적으로 능숙하게 운영했다. 그는 분업화와는 다른 작업 방식을 통해 인재를 발굴해냈고, 그 결과 매뉴팩처에 매우 성실하고 능력 있는 직원들을 양성해낼 수 있었다.

폴 다비드는 율리스 나르당이라는 브랜드의 전문적 지식의 상징이 되는 마린 크로노미터를 많이 만들어내면서도 항해용 크로노미터, 크로노그래프나 라트라팡테 기능의 크로노그래프, 미닛 리피터, 쿼츠 리피터 같은 컴플리케이션을 장착한 회중시계 등 다른 카테고리의 시계들도 포기하지 않았다. 1911년 폴 다비드는 크로노그래프 시계의 미닛 카운터에 관한 특허도 제출했는데, 이 특허는 명망 있는 매뉴팩처들이 인수해갔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시계 브랜드 율리스 나르당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폴 다비드가 제작한 해군들을 위한 마린 크로노미터는 율리스 나르당이 세계 시장에 진출하고 시계 판매의 흑자를 불러오는 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특히 남아메리카 시장은 율리스 나르당의 역사에서 가장 활기가 넘치는 시장 중 하나였다. 그 나라들 가운데 하나인 아르헨티나에서는 율리스 나르당이 최고의 스위스 시계로 통했으며, 플랜테이션 농장주나 사업가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진귀한 결혼 선물용 크로노미터 시계
19세기 말에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 명절을 맞이하여 선물을 주고 받을 때 가장 환영 받는 선물이 바로 시계였다. 특히 결혼은 선물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행사였고, 이때 예물용 시계는 빼놓을 수 없는 인기 선물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시계들은 18K 골드 케이스에 예술적인 장인들의 인내와 노하우가 담긴 무늬가 세공된 것이었다. 이 특별한 케이스를 완성하려면 적어도 5일 이상의 세공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골드 소재의 케이스는 백 케이스나 미들 케이스가 변형되지 않도록 충분히 두꺼워야 했다.

↑1874년 제작한 결혼 선물용 포켓 워치. 시리즈 번호 4500. 순금 케이스에 인그레이빙.

시계의 시리즈 번호 4500은 케이스에 새겨졌다. 율리스 나르당에서는 칼리버와 케이스 번호가 같았는데, 이 번호는 1874년부터 제작된 시계에 부여되었다. 율리스 나르당은 여전히 매뉴팩처를 운영했고, 폴 다비드는 시계 조정 작업을 했기 때문에 브랜드의 모든 시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손길이 한번씩은 반드시 거쳐가기 마련이었다. 백 케이스에는 왕립 독수리 형상과 함께 결혼할 두 남녀의 첫 이니셜을 합친 무늬가 새겨지곤 했다. 순금 위에 새겨진 조각도의 무늬는 장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기술의 정확함과 숙련도를 입증해준다. 따라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어야 했고, 어설픔이나 일말의 망설임도 허용되지 않았다. 

↑1874년 제작한 포켓 워치 다이얼.

19세기 율리스 나르당이 제작한 시계 대부분은 크로노미터였기 때문에 르로클의 매뉴팩처에서 발주되기 한참 전부터 조정공의 세심한 관리를 받았다. 1874년 율리스 나르덴 매뉴팩처에 결혼용 예물 시계 주문이 들어오자, 매뉴팩처의 모든 워치메이커와 장인들은 자신들의 노하우를 총동원해 케이스 세공에 특히 공을 들였다. 무브먼트에는 13개 주얼과 직선형 앵커가 쓰였지만, 열쇠로 태엽을 감는 방식이어서 시간을 맞출 때도 열쇠를 써야 했다. 와인딩과 시간을 맞추는 정사각형의 구멍에는 먼지 보호막이 씌워졌다. 골드 케이스는 클래식한 모델보다 더 무거워서 42mm의 지름에도 불구하고 지름 48mm나 50mm 모델에 버금갈 만큼 무게가 나갔다. 

↑Ref. 4500의 결혼 선물용 시계 칼리버.

1874년 이후 얼마 되지 않아 크라운으로 태엽을 감을 수 있는 와인딩 기능의 시계가 등장하면서 별도의 열쇠로 와인딩하는 시계는 사라졌다. 이런 변화는 1914년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넘어가는 변화보다도 그 영향이 컸다. 아마도 이 같은 이유로 열쇠로 감아야 하는 시계가 더는 젊은 신혼부부의 선물로 쓰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작된 케이스들은 이니셜이 새겨지지 않은 채 비어 있었고, 통합형 와인딩 시계와 손목시계의 유행으로 경쟁에서 점점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 거의 쓰이지 않았기에 이 무브먼트는 거의 새것처럼 남아 있었고, 케이스도 거의 마모가 되지 않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내내 열쇠로 감는 시계에 관심 두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로지 수준급의 세공이 들어간 시계들만이 금으로 주조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동안 많은 회중시계들이 겪어야 했던 운명이 바로 다시 금으로 주조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140년 전에 남긴 장인의 손길을 희생하거나 녹여버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현재는 오로지 박물관과 수집가들만이 이 시계들을 소장하고 있다. 

오늘날 이 시계들을 대중 앞에 선보인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금세 구매하려 할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정확성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당시 시계 제품에 대한 조건이 오늘날보다 훨씬 덜 까다로웠겠지만 그 정확도는 현대적인 크로노미터만큼이나 정밀하게 작동한다. 율리스 나르덴의 시계 제작 기술이 괜히 유명한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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